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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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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2017

주연 김남길, 천우희

감독 이윤기

 

살면서 누구나 적어도 한 번쯤은 상실을 겪는다. 슬픔에 잠겨 삶의 의미가 퇴색된 채 하루 하루가 그저 찾아왔다 지나가는 '어느날'이 되는 시절, 떠나간 사람이 머물었던 공간 속 잔상처럼 남아있는 생생한 기억들에 천천히 무뎌지는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보내는 시간들. 한두 번으로는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극히 개인적인 기억들을 남기는 쓸쓸한 경험.

 

폐에서 시작된 암이 세 번째로 다른 곳에서 재발했을 때 그는 스위스에 있는 안락사 업체에 연락해 '예약'을 마쳤다고 우리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통보했다. 아니, 그렇게 마냥 차분하고 평온하진 않았을 지 모른다. 말이 없다고 해서, 얼굴에 표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담담했다고 그의 태도를 단정짓자면 그것은 마주 앉아있던 나도 겉보기엔 마찬가지였겠지만 사실 마음 속에서는 온갖 감정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으니까. 

 

긴장하면 손가락을 만지작 거리는 그의 손버릇이 만들어내는 조용한 마찰의 소리가 꽤 오랜 시간 귀를 간지럽혔다. 사여귀가하는 이들을 만나본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그가 내린 예상 못한 의외의 결정에 나는 막상 이해와 공감의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살면서 갈고 닦은 역지사지의 기술은 이렇듯 겪어보지 못한 초면의 현실 앞에서 쉽게 무용지물이 되곤 한다. 

 

시간이 지나 그 날을 돌이켜 보았을 때 나는 분명 스스로에게 약간의 환멸을 느꼈다. 공감하기 어려운 것을 이해하길 약간의 인내도 없이 포기해버렸던 것, 대신 그가 과연 적절한 판단을 내렸는지 이성적으로 분석하려 들던 내 모습이 일단 마음에 들지 않았고 스위스로 가게 될 그의 계획에 대해 세세히 묻는 것으로 현실에 눈을 돌리는 척 말을 돌리며 환기를 꾀하는 방식도 구차했다. 어째서 그런 의미 없는 돈이니 시간이니 하는 건조한 얘기들만 늘어놓았을까? 다른 주제와 단어들을 선택해서 그를 아끼는 나의 마음을 어떻게든 표현할 수 있었을텐데. 그 모든 게 배려가 아니고 이기적인 현실도피였다고 생각하기 시작하고부터 느낀 후회의 감정은 '상실'을 겪은 뒤 작은 죄의식으로 바뀌어 내 안에 남았다. 

 

그래서일까, 두 번째로 이 영화를 봤을 때 나는 조그만 소리를 내며 엉엉 울었다. "그래, 이렇게 살 바에는 모든 게 끝나버리면 어떨까." 라고 말하는 강수의 독백 뒤에 어느 날 기억 속 그리운 사람의 낮은 목소리가 환청처럼 따라 들려오는 것 같아서, 아픈 이를 간호해 본 일이 없어 사람이 어떻게 변해갈 수 있는지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이유를 모른 채 울었다. 

 

영화는 이윤기 감독의 전작들과 비슷하게 남겨진 인물들의 이야기이고 또 거기서 남겨진 이들의 앞날을 예상하기 어려운 열린 결말의 형태로 끝이 난다. 하지만 이미 앞서 판단하고 분석하는 내 모습에 질려버렸던 나는 또 습관처럼 영화의 기획의도니, 메세지니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시작도 하기 전에 그만두었다. 떠나간 이에게 못다한 일들에 대한 죄의식으로 얼룩진 상처를 치유해 준 스토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신 조용히 흐르는 OST를 들으며 강수와 선화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이제 나 기억할 수 있지?" 

"내가 어떻게 너를 잊어" 

"아니 좋은 기억으로 말이야. 많이 힘들었지? 조금이라도 좋은 모습일 때 떠나고 싶었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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