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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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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뢰한 The Shameless (2015)

 

시나리오 자체는 김혜경의 시점에서 볼 때 사뭇 심플하다. 제목 그대로인 나쁜 놈들로 가득찬 영화. 하지만 정의를 구현하는 경찰과 범죄자 사이를 한끗 차이로 오가는 자신의 본래 정체를 속이고 가상의 인물을 연기하는 동시에 살인자의 애인에게 느끼는 사적인 감정까지 감추려 내내 일그러지는 정재곤의 얼굴에 집중하다 보면 영화는 갑자기 복잡해 지고 보는 이를 혼란에 빠뜨린다.

 

이해하기 힘든 상식의 소유자인 이 이상한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왜 이런 아이러니한 행동들을 하는가, 과연 사랑을 하긴 한 것일까? 그렇다면 왜 그래야만 했는가? 이어지는 질문은 끝이 없지만 감독은 등장 인물의 그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가치적 정의를 내리지 않은 채 모든 해석적인 부분을 오롯이 관객들의 몫으로 남겨버렸다. 게다가 속내를 짐작하라고 덧붙여주는 대사 한 마디,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어 줄 사이드 에피소드 하나 없이 내가 그저 이들을 관찰하는 위치에 처해 있음을 영화를 보는 도중에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대화라는 것은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적 위치를 가진다. 거짓말을 하지는 않지만 끝까지 솔직하지 못했거나 솔직할 줄을 몰랐던 것 같은 기구한 생을 살아온 여자와 솔직하려다가도 이내 감정을 숨기고 비겁하게 뒤로 숨은 뒤 수 많은 자기 합리화의 과정을 반복하는 남자 - 이 둘이 서로에게 이끌리는 과정 중에 나누는 대화에는 다른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없는 퇴폐적 중독성이 있다. 

 

누구나 떠올릴 수 많은 물음들에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화면을 향해 걸어오는 주인공의 얼굴에 무뢰한이라는 세 글자를 도장 찍는 것으로 그 답을 제시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나는 정재곤의 걸어가는 뒷모습과 살해당한 황철남의 애인이 신고있는 슬리퍼를 내려다보는 그의 무심한 얼굴을 보았고, 엔딩에서는 슬리퍼를 신고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있는 김혜경을 내버려둔 채 또 어디론가 걸어가는 그의 앞모습을 보았다. 이러한 시작과 끝냄의 연출은 그저 단순한 대칭의 기법일 뿐만 아니라 '이 남자는 여지껏 이런 방식으로 자기가 하는 일을 정당화 하며 살아왔고, 또 앞으로 그렇게 반복하며 살아갈 것이다'라는 영화 전체의 프레임 그 자체이다. 

 

그렇다. 우린 그냥 이 비겁하고 비열하며 무뢰한인 한 남자의 삶 중에서 어떤 여자와 사랑에 빠졌고 또 다시 상처 위에 다른 상처를 더했던 기억하기 싫은 에피소드 중 하나를 관람한 것이다. 

 

보고 있자면 약간 숨이 달릴 듯 호흡이 느리고 긴 씬들 속에서 찰나에 교차하는 감정을 빠르고도 섬세하게 표현하는 배우들의 연기, 또 그런 순간 순간들을 튀지 않도록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연출과 어둡고 푸른 새벽빛 넘치는 화면이 결국은 책장에 꽂혀있던 먼지 쌓인 멜빌 전집을 꺼내보게 만든다.

 

건조하기 짝이 없는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굴레 안에서 미묘하게 경계를 넘지 않고 격정적인 심리를 연기한 전도연의 김혜경은 콘크리트 바닥의 틈에 피어난 꽃 한송이같이 외롭고 갸냘프지만 아름다웠고 갈등하는 무뢰한의 복잡한 내면을 알 수 없게 연기한 김남길의 정재곤도 정말 매력적이다.

 

누구에게나 하나 쯤은 있을 실패한 소통의 기억을 떠올리며 더 나은 선택은 없었을 지, 혹시 그것이 합리화를 거쳐 미리 준비했던 체념의 결과는 아니었는지 되짚게 보게 만드는 -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고독하고 쓸쓸해서 도저히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기분을 달래기 힘들 것 같게 만드는 - O.S.T가 정말 좋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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